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직 존슨 (문단 편집)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전설 ===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의해서 1979년 [[NBA 드래프트]] 전체 첫 픽으로 뽑히게 된 매직은 가세하자마자 레이커스를 우승후보로 만들어놓았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매직은 첫 경기를 이기고 우승을 한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주변인들이 제발좀 그러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매직의 성격과 실력은 레이커스를 강호로 만들었고 결국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에 선정되고 레이커스는 60승을 거두게 된다. 결국 레이커스는 파이널에 진출하였고 우승을 하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다.] 레이커스가 전체 1순위를 가진 것은 약간 씁쓸한 행운에 가깝다. 원래 이 픽은 그해 꼴찌인 [[유타 재즈|뉴올리언스 재즈]]의 것인데, 이 픽을 행사하기 3년전인 1976년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가드이자 UCLA의 레전드인 게일 굿리치가 자유계약선수로 재즈와 계약하면서 그때 있었던 베테랑 FA 보상 제도로 인해 굿리치를 잃은 대신 재즈의 신인 지명권을 받아왔던 것. 1979년 1라운드 픽을 가져오는데 그해 재즈가 전체 꼴찌를 하고, 동부지구 꼴찌를 했던 [[시카고 불스]]와 [[동전 던지기]]를 해서 최종적으로 1번 픽을 얻게 되어 매직 존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굿리치는 이적 첫해인 1975-76 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2/3을 날렸고 굿리치는 이전부터 자신이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억지로 뛰게 했다는 사유로 레이커스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굿리치는 레이커스의 마지막 시즌 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달고 뛰었으며 이때문에 프리시즌 훈련캠프를 빠졌다고 무려 1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했기 때문. 다만 레이커스는 이 1픽으로 매직이 아닌 시드니 몽크리프를 뽑으려고 했다. 당시 매직이 1픽인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사람들이 매번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팀 사정 때문에 가드보다 센터가 필요해 2픽에서 마이클 조던이 아닌 샘보위를 뽑은 것 처럼 당시 가드가 필요했던 레이커스는 몽크리프를 선호했다. 카림(C)-윌크스(F)-댄틀리(F)-놈닉슨(G)으로 구성된 라인업이어서 포워드는 포화였지만 주전가드 한자리가 부족했다.[* 물론 스타팅 포워드도 스몰 포워드가 두명인 문제가 있었지만 가드 자리가 시급했다. 다만 댄틀리는 시즌 직전 유타로 트레이드 되고 레이커스는 우승한다. 훗날 댄틀리는 디트로이트에서 뛰다가 댈러스로 트레이드되고 디트로이트는 우승한다.] 매직이 가드인데 이건 또 뭔소리인가 싶겠지만 당시 NBA에서 매직을 포워드로 쓰려고 했지 가드로 쓰려는 이가 없었다. 단 한명만 빼고. 시드니 몽크리프를 뽑겠다는 결정을 감독 내정된 짐 맥키니에게 들고가자 맥키는 강하게 반대한다."우린 달릴거라고. 그리고 누군가는 NBA에서 포워드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매직존슨이라는 녀석이 우리 팀의 포인트가드가 될거라고. 우리 한테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라고 할 수 있는 놈 닉슨이 있지만 이 녀석이 우리의 포인트가드가 될거야. 우리 한테는 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는 7풋 센터가 있지만 우리는 그저 달릴거고 매직은 우리와 같이 달릴거야."[* Pearlman: “I could have written a book just on the 1979-80 Lakers. First they hire Jerry Tarkanian to be their coach then his agent is murdered so he doesn’t take the job. Then they hire Jack McKinney who is this guy nobody knows about. Then they have this 6’9” rookie point guard who they didn’t even want to draft initially, they wanted Sidney Moncrief, then they decide to take him and Jack McKinney says ‘We’re gonna run. And this guy Magic Johnson, some people want him to be a forward in the NBA, he’s not he’s going to be our point guard. Even though we already have arguably the best point guard in the NBA in Norm Nixon, this guy is going to be our point guard. And we’re just going to run teams to death, and even though we have this 7-foot center who is arguably the best player in the NBA, he’s going to run with us.’] 이런 맥키니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매직을 뽑게 된다. 이당시는 2번이 스윙맨화 되기 이전이라 데니스 존슨-데니 에인지, 거스 윌리엄스-데니스 존슨처럼 1, 2번이 리딩을 분담하는게 당연했고 1 ,2번간의 포지션 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굳이 감독이 포인트가드는 매직이고 슈팅가드는 놈 닉슨이라는 구분을 하는 것이 이상할 수도 있으나 당시 맥키니가 구상하던 (훗날 쇼타임이라 불리는)런앤건 농구는 포인트 가드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여기서 포인트 가드는 매직이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 다만 아직 매직의 경험이 미숙했던 관계로 전통적인 1-2번의 형태로 공을 나누게 된다. 이 발언은 우리 팀은 압둘자바가 있더라도 매직을 뽑아서 매직을 중심으로 재편할 것이고 이 팀은 매직의 팀이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엔 그 의미를 잘 이해못했다고. 루키 시즌에 결승에 진출해 Dr. J [[줄리어스 어빙]]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식서스와 붙었을 때, 2승 2패로 동률이던 상황에서 센터이자 주장인 [[카림 압둘자바]]가 발목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보여주며 5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뛸 수 없게 되자 모두들 '아 이젠 [[시망]]이구나'하고 좌절해 있는데 매직 혼자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매직이 있습니다."라고 선언, 경기 시작 전 코치를 찾아가 '''"저 센터볼래요"'''라고 했던 매직은 웃음을 터트린 코치에게 농담 아니라고 부연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직은 6차전에서 센터로 시작해 가드와 포워드 역할까지 수행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yYNDWaEmqto|경기 영상]] 사실 경기 장면을 보면 진짜 압둘자바처럼 골밑을 철저히 지키는 센터로 플레이한 건 아니고 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평상시의 플레이에 가까웠다. 1990년대 이후 농구를 본 팬들은 "어? 포스트업을 자주하니까 센터 역할을 한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이다.[* 포스트업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보다 포스트업 빈도수가 훨씬 잦고 능력도 앞서면 앞섰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거리에서 약한데 점프슛이 없고 세트슛으로 쏘기 때문.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찔러주기란 가드스러운 플레이 +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 or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란 파워포워드스러운 플레이가 공존하는 선수였다.[* 이때 압둘자바를 대신해서 센터로 점프볼을 한 것은 "내가 당신의 빈 자리를 메우겠다"는 제스쳐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결국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라는 경이적인 활약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1위는 1962 파이널에서 '''61득점'''을 올린 [[엘진 베일러]]. 공동 2위는 '''55득점'''으로 1967 파이널에서 [[릭 배리]]가, 1993 파이널 4차전에서 [[마이클 조던]]이 각각 기록했다(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파이널 시리즈 역대 최다인 평균 '''41'''점을 올리며 쓰리핏을 달성하게 된다). 4위는 1969 파이널에서 [[제리 웨스트]]가 기록한 53득점으로 그 유명한 '파이널 준우승 MVP'가 나온 시리즈에서였다.] 결국 파이널 MVP는 압둘자바가 아닌 매직의 차지였고, 이는 최연소 파이널 MVP(만 20세)이자 신인이 받은 첫번째이자 지금까지도 없는 파이널 MVP이다. 단, 위 문단에 대해 반론 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이다. -> 이는 압둘자바가 노쇠화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이다. 압둘자바는 포스트업시 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선수로 이 당시 감히 압둘자바의 공간인 포스트로 함부러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떄문에 전 시즌에는 포스트업 마스터라 불리는 애드리안 댄틀리도 압둘자바와 공존이 힘들었다. 매직이 커리어가 진행되면서 포스트업 비중과 훅슛 비중이 늘어 났지만 이 당시는 그런 건 꿈도 못꿀 루키시즌이었다. 매직의 주요 득좀 루트는 드라이브인과 미들, 롱투 점프슛이었다. 결승 6차전은 평상시와 달리 인사이더 답게 플레이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6차전 내내 포지션이 바뀌었고 그때 그때 마다 자기 포지션에 맞게 플레이 했다. 닉슨(G)-쿠퍼(G)-윌크스(F)-촌스(F) or 랜스버그(F)-매직(C)/닉슨(G)-쿠퍼(G)-매직(F)-랜스버그(F)-촌스(C)/ 매직(G)-닉슨(G)-쿠퍼(F) or 윌크스(F)-촌스(C) : 이런식으로 멤버 로테이션에 따라 계속 포지션이 바뀌었고 센터로 나올 때는 도킨스를 마크하면서 골밑을 사수하고 센터로서 역할을 했다. 특히 닉슨(G)-쿠퍼(G)-윌크스(F)-촌스(F) or 랜스버그(F)-매직(C) 이 라인업은 6차전에서 갑자기 결정한 것이 아닌 5차전 압둘자바가 부상으로 나간 이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가동된 라인업이고 이때 매직은 인사이더로 골밑을 철저히 지키면서 오히려 필라델피아와의 점수차를 벌려버린다. 시리즈2-2 동률에서 3승과 4승에서 압둘자바의 부재 속에 결정적인 승기를 가져 온다. 2.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찔러주기란 가드스러운 플레이 +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 or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란 파워포워드스러운 플레이가 공존하는 선수였다. -> 이 역시 팻라일리 사임 후 던리비가 부임한 이후 이야기이다. 매직이 하프코트에서 주구장창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간 건 던리비의 주문이었다. 매직이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포스트업 비중이 늘어나지만 그래도 던리비 이전에는 탑에서 포인트 가드 스러운 비중이 훨씬 높은 선수다. 오히려 87시즌 이전에는 거의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 탑에서 공을 지키기 위해 포스트업은 하지만 그건 당시 단신 가드 불문 모두가 하는 거였고. 당시 압둘자바는 리그 MVP였고 당연히 팀 내 독보적인 에이스였다. 그런데 갑툭튀한 신인이 한 시리즈 잘했다고 MVP와 모든 주목을 독차지한 것이다. 이때 매직은 21.5점 11.2리바운드 8.7어시스트 2.7스틸로 트리플 더블에 가까웠으나 압둘자바는 무려 33.4점 13.6리바운드 3.2어시스트 4.6블럭을 기록하며 양팀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게다가 압둘자바는 어차피 6차전을 질 거라고 생각하고 홈에서 열리는 7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가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지금은 NBA팀들이 전세기나 전용기로 이동하고 온갖 호화시설을 사용하지만 당시는 그렇게 환경이 좋지는 않았고 미국 끝과 끝인 필라델피아 - 로스앤젤레스 왕복비행을 하느니 컨디션 조절하면서 7차전 준비하는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갑자기 원정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졸지에 팀의 에이스가 팀이 우승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는 꼴이 되버린 것. 당시만 해도 상위시드팀 홈-하위시드팀 홈에서 번갈아가며 하는 경기수를 2-2-1-1-1로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만 8번 결승에 올라간 레이커스가 서부 끝이고, 디트로이트가 강팀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매번 파이널에 올라가던 필라델피아, 보스턴이 모두 동부연안 도시 연고팀들이라 이동거리가 장난아니게 길어지자 86년 파이널부터 2-3-2 시스템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위시드팀에 불리[* 홈 2연전에서 1패라도 하게 되면 1승1패 상태에서 원정 3연전을 치르는 부담이 있고, 2대2로 시리즈 전적 타이인 상황에서 5차전을 이기는 팀이 통계상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이 경우 그 중요한 5차전을 무조건 하위시드 팀의 홈에서 치르게 된다.]하다는 지적에 2014년부터 다시 2-2-1-1-1로 바꾼다.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거뒀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인상은 [[래리 버드]]가 가져갔다. 이때 매직은 자신도 충분히 신인상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버드에게 완전히 밀려서 실망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MVP나 신인왕 투표 기록을 보면 알지만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awards/awards_1980.html) 신인시절 둘은 까놓고 말해 레벨이 달랐다. (둘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버드가 훨씬 완성된 상태로 데뷔했기 때문) 버드는 이 해에 전 시즌에 29승을 거둔 팀을 혼자 힘으로 리그 전체1위인 61승으로 이끌며 MVP투표에서도 4위에 오르며 올 NBA퍼스트팀에 올랐다. 반면 매직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올스타에 선정되긴 했으나 MVP 투표에서 한 표도 못 얻고, 퍼스트팀은 커녕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이 정도 차이가 나니 버드가 신인왕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투표에서도 버드는 63표를 얻은 반면 매직은 3표에 그쳤다. 둘의 커리어를 보면 초창기는 더 성숙했던 버드의 우세 (매직은 4년차가 되어서야 퍼스트팀에 올랐다), 중반기는 용호상박, 그리고 버드가 몸이 망가지고 난 이후 후반기는 매직의 확연한 우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버드가 1984-85~1985-86 시즌 MVP를 차지한 이후 1986-87 시즌, 1988-89 시즌, 1989-90 시즌에 매직이 MVP에 올랐다. 그러나 매직의 팀성적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개인기량은 백중세지만 커리어 상으로 매직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 매직의 이 발언은 HBO에서 방영한 A Courtship of Rivals Basketball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직접''' 한 발언이다.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 우승을 거두고 루키로써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던 매직이 버드가 받는 주목에 자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슬슬 둘 사이의 라이벌 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버드 또한 1980-81 시즌에 파이널에 올라 휴스턴 로켓츠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해 매직과 동률을 이루었다. 이후 레이커스는 1982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으로 훗날 큰 경기에 강한 선수로 거듭날 제임스 워디를 지명했고, 시즌 초반에 7승 4패를 기록중이던 폴 웨스트헤드 감독이 경질되고[* 이 때 매직 존슨 본인이 웨스트헤드를 자르지 않을 거면 자신을 트레이드 해달라고 요구했다. 구단주 역시 웨스트헤드를 탐탁치 않게 여겨 그 전부터 해고하고자 했다고 한다.]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일리의 부임과 함께 레이커스는 승승장구하면서 1982년에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매직은 두번째 우승과 두번째 파이널 MVP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드디어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만나게 된다. 1차전을 잡으며 이기나 했지만 2차전과 4차전에서 매직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결국 7차전에서 셀틱스에 무너졌고 버드에게 복수당했다. 매직은 이때의 패배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회술한다. 1985년에 이를 갈고 다시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절치부심한 레이커스 멤버들과 (특히 압둘자바) 성공적으로 셀틱스를 이겨냄으로 작년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 다음해에는 아쉽게 휴스턴에 패배하면서 결승에 못 오르게 된다.[* 이 해 MVP는 버드로, 3년째 연속으로 MVP를 수상하고 팀을 67승으로 이끌면서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를 이끌게 된다. 팀 전체가 부상으로 얼룩진 1987년부터 셀틱스는 서서히 하락세에 접어드는데, 아이러니하게 1986셀틱스와 쌍벽을 이루는 매직 시대 최강의 스쿼드가 바로 1987년 레이커스. 압둘자바가 노화했지만 아직 좋은 기량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임스 워디]], 바이론 스캇 등 영건들이 성장하고 매직이 최전성기를 달리는 등 신구조화가 절묘하게 이뤄지면서 쇼타임 레이커스의 절정을 달렸다. 라일리 감독은 이 시즌에 팀의 중심을 압둘자바에서 매직으로 넘겼고, 매직은 득점 커리어하이까지 경신하며 생애 첫 정규시즌 MVP에 오른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1987년)에 기다리던 버드와 또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매직이 이기게 된다. 특히 4차전에 그 유명한 매직의 훅샷이 (그가 스스로 쥬니어 훅샷이라고 부르는) 나오게 되었는데 이 게임에서 탄력을 받으며 우승을 하게 된다. 이후에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셀틱스가 부진하게 되며 매직과 버드는 다시 재회하지 못하게 되어 이 시리즈가 그 둘의 마지막 시리즈가 된다. 그리고 매직은 이 시리즈에서 그의 마지막이자 세번째인 파이널 MVP를 얻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은 그의 절친 [[아이제아 토마스(1961)|아이제아 토마스]]의 "배드 보이즈"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1960년대 보스턴 이후로 처음으로 2년 연속 우승을 거둔 팀이 되었고 다섯 번 째 우승을 거두게 된다.[* 우승의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는데, 더티할 줄만 알았던 배드 보이즈의 수비는 엄청난 높이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안 레이커스 선수들은 매우 당황했고 5차전까지 2승 3패를 당하고 있었다. 6차전도 전반에 디트로이트가 리드를 가져가며 우승을 넘겨주나 싶었지만, 토마스가 3쿼터에 치명적인 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분위기가 넘어갔고, 6차전에서 레이커스가 1점차 승리를 거둔다. 이후 7차전에서는 워디가 36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달성하면서 폭주했고, 토마스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레이커스가 결국 3점차로 승리하고 리핏을 이루게 된다.] 그 다음해인 1989년에 두번째 MVP를 수상하고 팀도 파이널에도 진출을 했으나 2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일찍 아웃되면서 배드 보이즈에게 스윕당하고 만다.[* 이 시즌 이후 카림 압둘자바는 은퇴를 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 경기인 파이널 4차전에서 디트로이트 선수, 팬들에게도 박수를 받으며 화려하게 퇴장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89-90 시즌에 매직은 세번째로 MVP를 수상하나 2라운드에서 피닉스 선스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매직의 역사상 가장 빨리 플레이오프에서 제거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과 레이커스는 [[1991 NBA 파이널|파이널]]에 진출하나 상대는 디트로이트를 3전 4기로 물리치고 올라온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스카티 피펜]]의 수비에 고전하며 (그래도 18득점과 8리바운드 12어시) 우승에 실패하고 사실상 마지막 경기를 밟는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으나 1991년에 HIV 양성반응으로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참고로 기자가 "누가 당신에게 에이즈를 옮긴 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니 너무 많은 여자와 잠을 자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고(…).[* 1000명이 넘는다고 하며, [[마돈나]]도 그 중 하나였다고..] ~~[[침대]]에서도 올라운드 플레이어~~ ~~역시 마법의 [[존슨|거시기]]가 맞나보다~~[* 그와 절친했던 기자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많은 여자들이 매직과 관계를 갖고 싶으면 호텔에 있던 매직의 락커에 키를 두고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박스에 매일 수십 개의 키가 들어있었다고...] 당시 HIV보균자라는 사실은 대중에게 [[에이즈]] 환자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에이즈는 걸리면 바로 죽는 공포의 병이라 에이즈 환자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매직 존슨은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살았고, 이는 일반인과 환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완치제는 없지만 HIV 억제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서 관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만성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에이즈 관련 약품이 개발완료되어 시판되기 직전단계에서 많은 제공을 받는다고도 한다. 1991년 은퇴선언을 했지만 1991-92 시즌 올스타 득표에서 서부 가드 중 2위, 서부 전체로는 [[칼 말론]], [[클라이드 드렉슬러]], [[크리스 멀린]]에 이어 4위의 득표를 해버렸다.[* 매직이 올스타에 선정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공식적으로 은퇴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직이 HIV 보균자라는 것을 알린 시점은 1991년 10월인데, 이때는 이미 1991-92 시즌을 위한 트레이닝 캠프가 소집되고 선수단 구성이 완료된 이후였다. 때문에 매직은 공식적 은퇴가 아닌, 부상자 명단에 등록되어있었기 때문에 출전이 가능했다.] 매직의 득표수는 65만 표가 좀 넘었는데 서부 1위 말론은 76만 표대였으며 전체 1위는 유일하게 백만 표를 넘긴 마이클 조던이 차지했고 전체 2위는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었던 조던의 절친 [[찰스 바클리]]가 99만 여 표로 차지했다. 덕분에 92년 올스타 게임 주전으로 발탁되었고 당시 반시즌을 쉬었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활약. 게다가 결정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며 올스타전 MVP에 등극했다. 그리고 현역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NBA 드림팀 1기에 뽑히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커미셔녀였던 데이비드 스턴과 선수들이 왜 다른 나라들은 프로를 내보내는데 NBA에서는 꼭 대학생들을 내보내서 당하게 해야 하나는 의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도 프로농구 선수들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당시 가장 화제의 선수인 조던을 설득하였는데 조던이 거절하자 일단 상징적이었던 매직 그리고 버드를 설득한 다음에 그들을 주축으로 선수들을 모으고 결국에는 조던을 다시 설득하는 데 성공하며 드림팀이 결정되었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1995-96 시즌 중반에 현역 복귀를 선언하여 레이커스에서 32번을 다시 달고 뛰기도 했는데, 이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처럼 주 포지션이었던 [[포인트 가드]]로 뛰지 못하고 [[파워포워드]]로 플레이하였다. [[마이클 조던]]과 잠시 매치업~~MJ對MJ~~이 되는 등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다. 다시 은퇴할 때까지의 기록은 역대 통산 기록 평균에 꽤 뒤지긴 하지만 그럭저럭 준수했다. 복귀 당시 스탯은 14.6점 6.9어시 5.7리바로 커리어 평균에 크게 못 미쳤으며 36분 환산 스탯과 윈셰어 등 2차 스탯도 마찬가지였다. 센스는 여전했지만 전성기보다 크게 느려진 몸놀림과 무릎부상으로 예전같은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 등 젊은 코어로 리빌딩을 마무리해가던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전성기 기량을 잃은 과거의 전설이 사실 크게 필요하진 않았다. 올드팬들은 매직을 보며 즐거움을 느꼈지만 선수 커리어 측면에서 볼때 성공적인 복귀라고 하긴 어렵다. 어차피 당시 레이커스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로스터였고 매직 나이도 30대 후반이었기에 팬, 언론도 전성기 플레잉타임과 영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4년 이상의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저 정도의 스탯을 보여준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따라서 매직의 복귀는 성공적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이미 20시즌 전 이야기 이고 관련기사들도 찾기 어렵다. 당시 농구잡지를 참고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다르기에 각 자 판단에 맡기지만 매직은 이미 10시즌의 경력으로 이미 NBA 올타임 레전드 입성한 인물이기에 1995-96 시즌 복귀는 1991 파이널 이후 HIV로 인한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한 마무리이자 팬 서비스 차원의 선수경력이지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한 복귀는 아니었기에 크게 중요한 시즌은 아니었다. 다만 Hulu가 제작한 다큐 레거시:LA 레이커스 트루 스토리에 나온 내용은 위와는 조금 다르다. 위에는 전성기가 지난 매직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시 구단주 제리 버스는 매직의 복귀를 원했다. 그렇기에 매직 본인은 별로 원치 않았지만 버스의 강력한 요청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것. 매직의 은퇴후 쇼타임 멤버들이 대거 떠나면서 관중수도 급감했고,(아예 27개 구단중 관중동원수 24위를 기록한 시즌도 있었다.)92-93시즌엔 제리 버스가 구단을 인수한 후 처음으로 5할승률에 실패했고, 그 다음 시즌엔 아예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실패했다. 구단인수 첫해에 우승을 맛보고 총 9번의 파이널 진출, 5번의 우승이라는 황홀한 순간만 맛보던 그에게 있어 이 결과는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다. 거기다 제리 버스 본인 자체도 '로스엔젤레스에 연고를 둔 프로팀에는 슈퍼스타급 선수가 필수'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매직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매직 본인도 정상적인 체육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꾸준히 훈련을 했다. 참고로 매직의 복귀는 오히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같은 젋은 영건들이 더 원했다. 특히 닉은 36세의 매직의 기량에 감탄하며 '함께 뛰면 그에게 많은걸 배울수 있겠다.' 싶어서 그에게 함께 뛰자고 권유했고, 매직도 자신이 아끼는 후배들인 닉과 에디 곁에 경험많은 자신이 있으면 플옵진출 이상을(우승)노릴수 있을거라 확신하고 복귀를 하게 된것. 매직은 복귀후 32경기를 뛰었는데 이 기간동안 팀은 22승 10패라는 좋은 성적을 찍고 53승을 기록하게 된다. 홈구장은 매직을 보기위해 팬들이 몰리면서 표판매가 폭등했다. 그러나 저 기간동안 매직과 젋은 영건들의 마찰이 있었다. 매직이 분명 레이커스의 전설인건 사실이었지만 당시 팀의 리더는 엄연히 닉 반 엑셀이었다. 매직은 젊은 영건들에게 자신의 말대로 따를것을 요구했고, 이는 자유롭에 플레이하길 원하던 닉에겐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심지어는 아예 매직이 더 많이 공을 요구하자 닉은 더욱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다. 그 영향으로 감독인 델 헤리스와도 더 심하게 다투고 결국 심판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을 밀치는 행위로 나타난것. 그렇게 정규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찍었지만 팀의 케미스트리는 박살나있었다.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정규시즌 성적이 무색하게 1라운드에서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그리고 매직은 완전 은퇴를 선언했다. 다큐멘터리 내용으로만 보면 매직의 복귀는 성공이라고 할수 없었다. 그 이상의 성적을 매직 본인은 기대했겠지만 당시 레이커스의 젊은 영건들은 그정도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또한 매직 본인의 기량도 더 이상 전성기에 그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간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팀워크의 붕괴가 결정적이었다. 그 당시까지 쇼타임 레이커스의 종언을 인정하지 않았던 레이커스 수뇌부도 매직의 복귀가 통하지않자 사실을 직시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은 커리어 성적에서 볼 수 있다. 통산 기록이 거의 [[트리플 더블]]에 가깝다. 단일 시즌 통산 기록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오스카 로버트슨]]에 필적하는 대단한 기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